경양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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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장소 경양호(광주광역시 동구 계림동)
주제어 경양호, 하천/호수(광주), 김방, 경양역, 『여지도서』, 조탄보, 경호, 경호정, 태봉, 조희일, 정약용, 황윤석, 이학규, 설화, 스케이트장, 보트장, 구 광주시청
경양호 자리에서 바라본 무등산경양호 자리에서 바라본 무등산
 경양호(景陽湖)는 조선 세종 대의 인물인 김방(金倣)이 제방을 쌓아 축조한 대형의 인공 저수지였다. 당시 만들어진 제방은 광주읍성에서 경양역에 이르는 길이 1㎞ 이상의 대형으로 이의 완공을 통해 이 일대의 농토에 물을 안정적으로 공급할 수 있게 되었다. 이렇게 만들어진 인공호수를 경양호라 불렀는데 오늘날의 대인동 및 계림동 일대에 자리하고 있었다. 경양호는 이외에도 경호(鏡湖), 연지(蓮池), 영지(影池), 금교제(金橋堤), 서방지(瑞坊池) 등으로 불렸다. 

 경양호를 건축한 김방은 광주 출신의 인물로 김제 군수, 지고부군사(知古阜郡事), 전라도 도절제사 진무(都節制使鎭撫)를 지낸 기록이 확인되며, 태종대에는 벽골제의 수리를 맡기도 했던 인물이다. 이외에도 지고부군사로 있으면서는 고부의 눌제 수축에도 기여했던 것으로 보인다. 통설로는 그가 광주목사로 있으면서 경양호를 축조한 것이라 하지만 김방의 광주목사 임명은 관련 기록을 찾을 수 없다. 또한 경양호가 축조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1440년대의 광주는 1430년 이래로 읍격이 목에서 군으로 낮아진 상황이었기 때문에 광주목사라는 직책이 존재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한편, 김방은 1419년 전라도의 도절제사 진무가 되어 이듬해에 부임하게 되는데 이 시기는 광주에 있던 전라도 도절제사영이 강진으로 옮겨가는 과정에 해당된다. 따라서 이의 축조가 김방에 의한 것이라면 가능성이 높은 시기는 1420년 즈음일 것으로 판단된다. 이 경우 김방은 전라도 도절제사 진무로서 병영에 속하던 토지나 둔전에 농업용수를 공급하기 위하여 경양호를 축조했을 가능성이 있다. 일제강점기까지 경양호는 국유지로 관리되고 있었다. 이는 경양호의 축조가 국유지의 일부에 인근의 둔전에 공급할 농업용수 확보를 위한 것이었을 가능성이 있음을 보여준다.

 한편, 경양호 인근에는 조선시대의 역참인 경양역이 자리하고 있었다. 따라서 주변의 역둔토(역의 유지에 필요한 재원을 확보하기 위한 토지)에 농업용수를 공급하기 위해 조성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그리고 훗날 다른 수원들이 어느 정도 확보된 이후에는 경양호의 일부가 역둔토 등으로 전용되었을 가능성도 있어 보인다. 이는 시기별로 각각 차이를 보이는 경양방죽의 규모에서도 확인된다.

 18세기에 제작된 지도인 『여지도서(輿地圖書)』의 기록에 따르면 경양호의 둘레는 5,560자에 달했다고 한다. 이는 대략 1,668m에 해당한다. 그러나 이는 다른 기록 등과 비교할 때 문제가 있다. 따라서 경양호의 둘레라기보다는 둑의 길이가 잘못 와전된 것일 가능성이 있다. 또한 앞서 언급한 것처럼 처음 만들어진 이후 여러 차례 다시 고쳤을 가능성도 있다.

 경양호의 수원은 인근에 위치한 야트막한 산지의 수원 이외에 광주천의 일부 구간에 조탄보라는 보를 세워 강제로 유입시킨 물이었다. 그렇게 하여 전남권역에서는 보기 드문 거대한 호수가 이루어졌던 것이다.

 경양호는 조선시대에 주로 경호(鏡湖)라고 불렸는데 이는 거울처럼 맑고 깨끗한 물이 가득 차 있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광주의 치소인 읍성 인근에 위치한 호수였기 때문에 조선시대에도 이미 이 지역을 방문하는 사람들이 즐겨 찾는 명소가 되었으며, 주변에는 경호정(鏡湖亭)과 같은 유명한 정자가 세워지기도 하였다. 무등산에서 영산강변에 이르기까지 산지는 거의 존재하지 않는 광주의 특성상 경양호와 그에 인접한 태봉이 만들어내는 풍광은 한때 광주인들의 자부심이기도 하였다.

 이렇게 명승으로 알려진 경양호를 찾은 조선시대의 시인 묵객들 중에는 조희일(趙希逸, 1575~1638), 정약용(丁若鏞, 1762~1836), 황윤석(黃胤錫, 1729~1791), 이학규(李學逵, 1770~1835) 등이 있다. 이들은 경양호의 풍광을 시로 노래하였고, 이 시들은 현재 그들의 시문집에 남아 전해지고 있다. 따라서 이 시들을 통해 당시 경양호의 모습을 어느 정도는 그려 볼 수 있다.
 
경양의 못가를 지나며(過景陽池) - 정약용(1779)

잡목은 큰길가에 늘어섰는데  
역루의 가까운 곳 저수지 하나  
얼굴 비친 봄물은 아득히 멀고 
저문 구름 두둥실 한가롭기만
대밭 성해 말 몰기 여의치 않고
연꽃 피어 뱃놀이 제격이로세
위대할사 저수지 관개의 공력
일천 이랑 논들에 물이 넘치네 

 1779년, 정약용은 화순현감으로 부임한 아버지를 따라 경양호를 지나갔다. 그 과정에서 소회를 읊은 것이 위의 시이다. 이를 통해 경양역에 인접하여 호수가 있었고, 그 둑에는 대나무가 무성하였음을 알 수 있다. 또한 호수에는 연(蓮)이 자라고 있었고, 뱃놀이로 유명한 곳이었음도 알 수 있다. 한편, 그는 경양호의 아름다운 풍광 내면에 자리한 이 호수가 가진 진면목도 바로 알아차린 듯하다. “위대할사 저수지 관개의 공력, 일천 이랑 논들에 물이 넘치네”라는 구절은 경양호가 만들어진 이유이자 근본적인 존재 이유기도 했기 때문이다. 다음은 정약용과 같은 시기를 살았고, 서로 같은 뜻을 품기도 하였던 이학규의 시이다.
 
경양호(景陽湖) - 이학규(1801)

광주성 동쪽에 벽옥 같은 호수가 있어
물길이 비스듬히 거울 같은 호수 속으로 들어가네
촌로는 모래 밟으며 그물질을 하는데
나그네는 돌에 기대어 거룻배 오가는 걸 지켜보네
새봄 물결 속에 용과 자라 보이는 듯하고
날이 저물면 연꽃 사이로 바람이 이는 듯한데
남쪽에 오니 물색은 더욱 고우나
떠도는 이내 신세는 회포만 깊어가네

 어린 정약용이 아버지의 임지를 찾아 한가한 여행 중이었다면, 이학규는 1801년 발발한 신유사옥(辛酉邪獄)에 연루되어 화순으로 귀향길을 가는 중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시는 감정의 격정이 없이 경양호의 풍경을 스케치하듯 그리고 있다. 경양호 인근에는 모래톱이 있고, 그 위에서 그물질을 하는 풍경이 보이며, 호수 위로는 거룻배가 오가고 있다. 맑은 물색은 거울을 떠올리게 할 정도이며, 연꽃이 한참인 풍경은 정약용이 읊은 모습과 동일하다. 다만, 훗날을 기약하기 힘든 유배지를 앞에 두고 보는 아름다운 풍경은 그의 가슴에 깊은 회포를 남기고 말았다.

 한편, 경양호에는 김방의 경양방죽(제방) 축조 과정과 관련된 설화가 하나 전하고 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 공사가 착공되던 해에도 수년째 거듭되는 가뭄으로 공사장의 인부들이 헐벗고 굶주림에 허덕이고 있었으며, 허기져 쓰러지는 사람들이 헤아릴 수 없었다. 그러나 식량난은 날이 갈수록 더 했다. 이 같은 참상을 가슴 아파하던 김방은 하루도 빠짐없이 공사현장에서 땀을 흘리며 진두지휘하면서 인부들을 위로하고 격려했다.
어느 날 김방은 일터를 돌아보다가 무너진 흙더미 사이의 개미집에서 수천수만의 개미떼가 쏟아져 나와 우글거리는 것을 발견했다. 하찮은 미물이지만 집을 잃고 흙더미에 깔려 죽게 될 것을 측은히 여긴 김방은 인부를 시켜 개미집이 다치지 않게 곱게 떠서 무등산 장원봉 기슭에 그대로 옮겨 주었다.
이 일이 있은 다음날 김방은 새벽잠에서 깨어 뒤뜰을 돌아보다 깜짝 놀랐다. 이게 웬일인가. 거기에는 하얀 쌀이 쌓여 있지를 않는가. 집안 식구들을 깨워 연유를 캐어물었으나 아무도 이 까닭을 아는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김방은 차근차근 연유를 가릴 겨를이 없었다. 온 마을의 큰 가마솥을 모아 밥을 짓게 하여 공사장의 인부들을 골고루 배불리 먹였다. 이것은 하나의 기적이었다.
헌데 더욱 놀라운 것은 다음날도 똑같이 뒤뜰에는 쌀이 쌓여 있었다. 사흘째 되던 날 김방은 자정께 뒤뜰에 살며시 숨어들어 동정을 살펴보았다. 그랬더니 수천수만 마리, 수억 마리의 개미떼들이 쌀알을 물어 날라다가 뒤뜰에 쌓았다. 개미들의 이 작업은 첫 닭이 울 무렵까지 계속되었고 어느새 쌀은 뒤뜰 안에 가득해졌다. 김방은 개미들이 집을 옮겨 살게 해준 데 대한 보은임을 짐작하고 이 쌀을 단 한 톨도 다른데 허비함이 없이 오로지 공사장에서 땀 흘려 일하는 인부들을 배불리 먹였다. 이 개미의 보은은 공사가 끝날 때까지 계속되었으며, 덕분에 경양지의 대역사는 3년 만에 완공을 보아 광주야말로 가뭄을 극복하는 고을이 되었다.

 위의 설화는 경양호라는 거대한 공사를 이루어낸 김방에 대한 존경과 그 결과물인 경양방죽의 엄청난 규모에 대한 신비감에서 만들어져 구전된 것으로 보인다. 설화 속에서 김방은 하찮은 미물인 개미들의 삶에 대해서도 경외감을 잃지 않는 인물로 그려진다. 한편으로 이 개미들은 김방을 지지하고, 그의 경양호 축조 역사를 도운 민초들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는 경양방죽의 축조에 다양한 사람들의 폭넓은 지원이 뒷받침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이야기는 인부로 동원된 수천의 지역민들에게 주먹밥 등의 식사를 건네는 축조 당시의 모습이, 김방에게 쌀을 물어다 준 개미의 모습으로 바뀌어 표현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일제강점기에 경양호는 국유지로 관리되었다. 이것은 경양호의 운명이 식민지 경영자들의 손에 좌지우지 될 수밖에 없었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1930년대 이후 일본인들은 조선 각지에 영구적인 일본인 거주지를 마련하기 위해 고민했다. 이것은 광주 역시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이미 도심이 상당히 개발된 광주 일대에서 일본인들을 위한 새로운 거리를 조영하기 위해서는 부득이 그때까지 개발이 이루어지지 않았던 지역에 눈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마침 일본인들의 눈에 들어왔던 것이 광주의 도심 인근에 위치한 경양호였다. 그리고 일본인들은 이를 매립하고 시가지를 확장할 계획을 세운다.

 경양호는 모두 2차례에 걸쳐 매립되었는데, 첫 매립은 이처럼 일제강점기인 1937년 일제의 주도로 이루어졌다. 일제는 경양호를 매우고, 이곳에 택지를 조성하여 새로운 일본인 거리를 조성할 계획을 세웠다. 일본인들의 이러한 계획에 대해서 광주에서는 오방 최흥종 목사를 대표로 하는 ‘경양방죽 매립 반대 투쟁 위원회’가 결성되어 이의 백지화 운동을 벌였다.

 지역 사회의 거센 저항에 부딪힌 일제는 경양호의 전면 매립에서 한발 물러나 전체 면적의 ⅔는 매립하고, 나머지 ⅓을 남겨 계절에 따라 스케이트장이나 보트장으로 이용하도록 하였다. 결국 4만여 평에 달하는 광대한 면적이 매립되었으나, 경양호의 남은 부분은 여전히 광주 시민들의 휴식처로 활용되었다.

 해방 이후 1966년 광주는 경양호의 농업용수 확보의 의미가 사라지고, 수원으로서의 기능이 약화되었으며, 오염이 심각하다고 하여 이를 매워 택지를 조성할 계획을 세운다. 이때에 태봉산을 헐어 토석을 판매하는 한편, 일부는 경양호를 매우는 데 사용하였다. 그렇게 하여 1967년 공사가 끝난 뒤에는 광주의 이름 높던 두 아름다운 경관이 한꺼번에 모두 사라지게 되었다. 그리고 매립지 한쪽에 옛 광주시청을 비롯한 도심이 형성되었다. 그리하여 그 실체는 사라졌지만, 그 시기에 남겨진 다양한 사진에는 경양호에서 뱃놀이와 스케이트, 소풍 및 유람을 즐긴 광주인들의 모습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구 광주시청 자리구 광주시청 자리


 
참고문헌 목록
참고문헌
-『신증동국여지승람』.
-『조선왕조실록』.
-국립광주박물관, 『광주 : 유구한 문화의 도시』, 국립광주박물관, 2008.
-박선홍, 『무등산』, 다지리, 2012.
-정약용, 『다산시문집』.
-「개미의 보은으로 된 경양방죽」, 지역정보포털(http://www.oneclick.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