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제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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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장소 천제단(광주광역시 동구 운림동, 신촌고개~중머리재 중간지점)
주제어 천제단, 민속신앙, 민속의례, 기우제, 기설제, 기청제, 천제봉, 천제등, 이은상, 『동국여지승람』, 무등산신사, 『세종실록지리지』, 최부, 「표해록」, 최남선, 나도규, 「서석록」, 허백련, 단군신전, 연진회, 광주민학회, 시산제, 소사, 국제, 읍치제, 산악숭배사상
천제단천제단
 천제단은 증심사에서 중머리재로 가는 중간 지점인 신촌고개에서 왼쪽으로, 무등산 중턱 북서쪽으로 내민 자그마한 봉우리에 위치하고 있다. 봉우리에는 널찍한 평지에 ‘천제단(天祭壇)’이라는 표지가 서 있다. 이곳은 새인봉이 천제단을 향하여 엎드려 있는 군신봉조형(君臣奉詔形) 산세를 이루고 있다. 

 천제단은 옛날 광주고을 사람들이 국태민안(國泰民安)을 기원하거나 기우제(祈雨祭), 기설제(祈雪祭), 기청제(祈請祭)를 지냈던 제단으로 천제봉 또는 천제등이라 부르기도 했다. 원래는 상대, 중대, 하대로 형성되어 있었으나 일제강점기 일본인들이 제단을 허물어 버렸다. 광복 이후 돌탑으로 복원했으며, 돌탑 옆으로 천제단이라는 표지판을 세웠다. 돌탑의 규모는 둘레 840㎝, 높이 220㎝이다. 

 천제단의 위치에 대하여 노산(鷺山) 이은상(李殷相, 1903~1982)은 “『동국여지승람』에 ‘무등산신사’가 있다 했는데 그 유적이 지금 이 산중의 어느 지점인가를 정확히 말하기는 어려우나 그 거리를 표시하였으되 현의 동쪽이라 한 것으로 보아 천제등이 곧 무등산 신사의 유적이라고 생각한다.”고 적고 있다. 이은상이 언급한 『동국여지승람』의 기록은 다음과 같다.
 
무등산신사(無等山神祠)는 현의 동쪽 10리에 있다. 신라 때는 소사(小祀)를 지냈으며, 고려 때는 국제(國祭)를 올렸다. 동정원수(東征元帥) 김주정(金周鼎)이 각 관청의 성황신(城隍神)에게 제사를 지낼 때 차례로 신명(神名)을 불러 신의 기이함을 징험했다. 그런데 이 광주의 성황신이 큰기[纛旗]의 방울을 울린 것이 세 번이었기 때문에 김주정이 조정에 보고하여 작위를 봉했다. 본조에 와서도 춘추로 본읍에 명하여 제사를 올리도록 했다.

 무등산신사의 영험함은 여러 문헌에서 확인된다. 무등산신사에서 고을과 나라의 안녕을 기원한 기록은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에도 기록되어 있으며 최부(崔溥, 1454~1504)의 「표해록(漂海錄)」에는 표류의 원인을 ‘광주의 무등산과 나주의 금성산에 제사를 지내지 않고 길을 떠났기 때문’으로 기록하였다.

 하지만 무등산신사가 곧 천제단인지에 대해서는 확정적인 결론을 내리기 어렵다. 육당(六堂) 최남선(崔南善, 1890~1957)은 예전에는 각 고을마다 자기네 경계 안에서 제사를 모시게 되었는데 광주에서는 입석대에서 제를 모셨다가 훗날 지금의 천제단에서 제를 모셨을 것이라 했다. 이에 대해 박선홍은 모든 제단이 그러하듯 천제단도 원래는 오르기 힘든 입석대에 있었으나 점차 인가에 가까운 곳으로 내려와 이곳을 친숙한 배천(拜天)의 제단으로 삼은 것이라 짐작한다고 했다. 일제강점기에 민족혼을 말살하기 위하여 이 제단을 흔적조차 없이 허물어버렸다가 이후 광주 어른들이 기금을 모아 광주청년회 이름으로 다시 제단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무등산 천제단에 대한 문헌상 최초의 언급은 나도규(羅燾圭, 1826~1885)의 「서석록(瑞石錄)」에서 찾아진다. 나도규는 이 글에서 “천제단에 나아가 머리 숙여 읍하고 바라보니 산허리가 평평히 배열되었다가 이곳에 이르러 돌기하여 한 높은 봉우리가 되었으니 봉우리의 머리는 곧 제단을 설치한 곳이다.”라고 하였다. 이 글이 쓰인 것은 1868년 고종 5년 때이다. 이로부터 4년 후인 『1872년 지방지도』(광주)에 증심사 상원암 위쪽 15리에 천제단이 그려져 있어 이 시기에는 현재의 위치에 천제단이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박선홍의 글에 의하면 일제강점기에 허물어져 버린 천제단에서 다시 제를 모시게 되기까지는 의재(毅齋) 허백련(許百鍊, 1891~1977)의 역할이 컸다고 한다. 허백련은 천제단을 민족의 제단으로서 신성시하고 이곳에 단군신전을 건립하여 민족 긍지의 구심점을 마련하고자 앞장섰다. 그는 이 사업을 추진하기 위하여 1969년 서울 조흥은행 화랑에서 기금마련을 위한 한국화 개인전을 열고 여기서 얻어진 당시의 돈 5백여만을 기금으로 희사하여 무등산개천궁건립추진위원회를 발족시켰다. 그는 이를 모체로 단군신전의 건립을 추진하여 1974년 12월 21일에 기공식까지 가진 바 있었으나 당시 기독교 단체의 반대로 더 이상 진전을 보지 못한 채 오늘에 이르고 있다. 다만 매년 10월 3일이면 광주의 뜻있는 인사들과 민간단체들이 천제단에서 개천절 제전을 집전해왔으며, 1965년 이래 지금까지 한 번도 빠짐없이 이어져 오고 있다. 천제단에서의 개천제전은 초기에는 연진회(練眞會)에서 주도하였다가 1988년 이후부터 광주민학회가 집전을 하고 있다.

 근래에는 소규모 동호회나 기업, 회사 차원에서 시산제(始山祭)를 모시는 사례도 심심치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시산제는 산악인들이 매년 연초에 지내는 산신제를 말하는데, 정기적으로 올리지는 않더라도 등산을 시작하는 차원에서 산신에게 제를 올리면서 서로 우의를 다지기 위한 목적도 포함된다. 

 무등산은 통일신라시대부터 소사(小祀), 국제(國際), 읍치제(邑致祭)의 대상이 되어 지역에 파견된 중앙관리 내지는 수령의 주관 아래 정기적으로 그에 대한 제의가 거행되었다. 무당이나 민간인들의 기도처로 각광을 받기도 했다. 고대부터 형성된 우리 민족의 산악숭배사상이 원류가 되어 시대에 따라 확대 축소의 과정을 거치면서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참고문헌 목록
참고문헌
-광주시립민속박물관, 『무등산 유산기』, 광주시립민속박물관, 2000.
-김경수, 『광주광역시 대한지명유래지』, 국토지리정보원, 2010. 
-박선홍, 『무등산』, 다지리, 2008.
-서해숙, 「무등산 숭사의 전통과 현대적 계승」, 『남도민속연구』, 24, 남도민속학회, 2012.
-전남대학교박물관․광주광역시 편, 『문화유적분포지도 광주광역시』, 전남대학교박물관, 20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