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등산의 종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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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등산도』19세기 영남대박물관 소장 ⓒ 영남대박물관『무등산도』(19세기, 영남대박물관 소장) ⓒ 영남대박물관
 신산(神山)으로 여겨온 무등산에는 불교, 유교, 도교, 기독교의 자취가 남아있다. 많은 사람들이 무등산에 법등을 켜고 부처의 길을 갔다. 또 어떤 사람들은 숭고한 죽음으로 나라를 구하고 충효의 길을 갔다. 또 다른 사람들은 무등산에 은거하면서 신선의 길을 갔다. 또 어떤 사람들은 겸손하게 가장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헌신하는 성자의 길을 갔다. 그 향기와 결들이 무등산에 남아있다.

 무등산은 불교와 인연이 깊다. 사람들은 무등이라는 이름을 『금강반야경(金剛般若經)』의 ‘무등등주(無等等呪)’나 『화엄경(華嚴經)』의 ‘무유등등(無有等等)’의 견줄 바 없이 훌륭하거나 차별 없이 평등하다는 불교적 의미로 해석한다. 곳곳에 불교식 이름을 붙여 정상의 지왕봉은 비로봉, 인왕봉은 반야봉이라고 불렀다. 규봉(圭峰)에는 여래를 주존으로 관음, 미륵 삼존석(三尊石)이 있다. 또한 규봉의 주변에는 법화대․설법대․능엄대 등의 불교식 이름으로 불리는 십대석(十臺石)이 있다. 이 뿐만 아니라 화엄삼사(華嚴三師)로 불리는 세 분의 성인을 따라 원효사(元曉寺)․의상봉(義湘峰)․윤필봉(潤筆峰)이 있다. 고려시대 수선사(修禪社) 고승들은 평온한 마음으로 도를 깨우치기 위해 무등산에서 참선하였다. 1574년 고경명(高敬命, 1533~1592)의 무등산 기행문 「유서석록(遊瑞石錄)」에 의하면, 그때까지 무등산에는 증각사, 입석암, 염불암, 상원등, 삼일암, 금탑사, 은적사, 석문사, 금석사, 서봉사 등 수많은 절들이 있었다. 1925년 최남선(崔南善, 1890~1957)의 여행기 『심춘순례(尋春巡禮)』에도 무등산에 절이 많아 열 걸음마다 하나였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은 옛 절 가운데 증심사(證心寺), 약사사(藥師寺), 원효사, 규봉암(圭峰庵) 정도만 남아있다.

 유교는 인(仁)을 근본으로 하는 유학을 받드는 가르침으로 제정일치를 종지로 삼고, 삼강오륜을 덕목으로 하며, 국가 이데올로기로 자리 잡았다. 1398년 광주향교가 무등산 장원봉 아래에 세워져 광주에 유학을 가르치는 국립기관의 역할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고려 말 절의신(節義臣) 전신민(全新民)이 무등산에 은거처를 두었고, 왜적들이 두려워 떨던 명장 정지(鄭地, 1347~1391) 장군의 사당 경렬사(景烈祠)가 무등산에 있으며, 충절과 억울한 죽음이 안타까운 김덕령(金德齡, 1567~1596) 장군의 사당 충장사(忠壯祠)가 또한 무등산에 있다. 그리하여 무등산에는 충렬의 혼이 깃들어 있다.

 무등산의 도교 숨결은 그곳을 영험한 기운, 신선 같은 기운이 들어가 있는 곳으로 보게 한다. 무등산의 상서로운 기운은 산신으로 여겨졌고 제를 통해 산신과 소통하게 하였다. 일찍이 무등산에서는 통일신라시대에 무등산신단(無等山神壇)에서 소사(小祀)를 지냈다. 무등산은 고려시대에 서석산(瑞石山)이라는 별칭으로 불렀다. 서석산은 토산의 무등산 정상을 중심으로 서석대, 입석대, 규봉 등 상서로운 돌기둥이 있는데서 연유한다. 고려․조선시대에는 각각 국제(國祭)와 읍제(邑祭)를 올렸다. 고려중기 풍수와 비술에 정통하였던 은원충이 무등산처사로 불리며 중앙 사상계의 변화에 영향을 주었다.

 무등산에 그려진 기독교의 특점은 교파를 초월하여 질병과 굶주림에 고통 받는 고아와 환자들을 향한 헌신이었다. 오방(五放) 최흥종(崔興琮, 1880~1966) 목사, 맨발의 성자 이현필(李鉉弼, 1913~1964)의 행적이 증명하듯이 사회의 가장 낮은 곳에서 행복과 나눔을 사람들과 함께 하였다.

 이처럼 불교, 유교, 도교, 기독교는 무등산에서 각자의 보금자리를 마련하면서도 너그럽게 서로가 서로를 존중하며 무등산의 품속에 함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