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심사

home home > 디지털아카이브 > 종교 > 증심사
관련장소 증심사[광주광역시 동구 증심사길(운림동)]
주제어 증심사, 불교, 도윤(철감국사), 정호(박한영), 한용운, 조계종, 담진(혜조국사), 김방, 증심사 오백전, 서석산신단, 『무등산도』, 증심사 삼층석탑, 최남선, 이은상, 증심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 증심사 석조관음보살입상, 증심사 칠층석탑, 광주광역시 문화재자료
증심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증심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
 증심사는 무등산을 대표하는 유서 깊은 사찰이다. 860년경 구산선문 중 사자산문의 토대를 이룬 신라시대 철감국사(澈鑑國師) 도윤(道允, 798~868)이 선종사찰로 창건한 것으로 전한다. 1910년 근대시기 조선불교를 일본불교에 종속시키려는 데 대항하여 박한영(朴漢永, 1870~1948), 만해(萬海) 한용운(韓龍雲, 1879~1944) 등이 한국불교의 정통을 천명하는 승려대회를 증심사에서 열었다. 그들의 임제종운동은 한국불교의 개혁운동, 민족운동의 정신적인 근원이 됐다. 대한불교 조계종 사찰이다.

 증심사의 창건주로 알려진 철감은 신라 선종 9개의 산문 중 하나인 사자산문을 열었던 선사이다. 이후 1094년 고려시대 혜조국사(慧照國師) 담진(曇眞)이 중창하였는데, 혜조국사는 고려후기 선종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1443년 조선 세종 때 광주목사 김방(金倣)이 오백전(五百殿)을 지어 중창하였다. 김방은 광주에 인공호수 경양방죽을 만들어 농토를 옥답으로 만들었고 좌찬성까지 올랐다. 정유재란 때에 오백전만 남고 소실된 이후 1609년에 석경 등이 중창하였다. 한국전쟁으로 거의 소실되어 근래에 지금의 모습으로 복원되었다. 산신각 뒤 암벽에 새겨진 ‘서석산신지위(瑞石山神之位)’ 위패는 불교와 민속신앙이 습합되어 나타난 변용이다.

 증심사는 여러 차례의 전란과 화재로 유실된 유물이 적지 않고 대신 다른 사찰의 유물들과 인연을 맺었다. 19세기 『무등산도(無等山圖)』(영남대박물관 소장)에 나타난 증심사는 전각과 누각이 제법 밀집해 있다. 그리고 현재의 오백전으로 추정되는 전각 앞에 삼층석탑 한 기가 그려져 있다. 1920~1930년대 최남선과 이은상(李殷相, 1903~1982)의 여행기에는 대웅전의 앞뒤로 탑이 적지 않다고 하였고, 한국전쟁 직전의 사진에 화려한 다포가 선명하게 보이는 대웅전 앞으로 세장한 형태의 고려시대 칠층석탑, 조선 초기 오층석탑이 보인다. 현재 두 탑은 오백전 옆 대웅전 좌측으로 옮겨 자리를 마련하였다. 증심사 비로전의 철조비로자나불좌상(鐵造毘盧遮那佛坐像)이 1934년 옛 전남도청 근처의 대황사에서 옮겨왔다(보물 제131호). 대웅전 우측 원통각의 석조관음보살입상과 칠층석탑이 1966년에 서봉사지(瑞峯寺址) 혹은 대황사지에서 옮겨온 것으로 전한다. 1933년 오층석탑을 해체할 때 금동불 2구, 오층철탑(19㎝), 소형철불 2구, 수정 1점, 청옥세주 23점 등이 발견되었으나, 한국전쟁 때 국보 211호 금동석가여래상(15.9㎝), 국보 212호 금동보살입상(18.2㎝)을 잃어버렸다. 증심사 도량 전체는 광주광역시 문화재자료 1호로 지정되어 있다.

증심사 일주문증심사 일주문
증심사 산신각증심사 산신각
증심사 대웅전증심사 대웅전


 
참고문헌 목록
참고문헌
-김대현 외, 『국역 무등산유산기』, 광주시립민속박물관, 2010.
-문화재청, 『한국의 사찰문화재 광주광역시‧전라남도 1』, 문화재청, 2006.
-박선홍, 『무등산』, 금호문화, 1998. 
-이경화, 「무등산 불교문화의 신앙적 양상과 교류」, 『역사학연구』, 45, 2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