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봉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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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장소 규봉암(전라남도 화순군 이서면 영평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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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봉암규봉암
 장불재를 넘어 고려 말의 고승 지공화상(指空和尙, Dhyānabhadra, ?~1363)의 전설이 서린 지공너덜을 지나면 규봉의 기암절벽 아래 유서 깊은 고찰 규봉암이 있다. 규봉암의 역사는 짧지 않고 머물렀던 이들의 명망 또한 높다. 규봉암은 의상대사(義湘大師)의 초창설이 있고, 의상대사의 법손 순응대사(順應大師)가 798년 당에서 귀국하여 창건하였다고도 한다. 현재는 관음전을 주 전각으로 하며, 대한불교조계종 제21교구 본사인 송광사(松廣寺)의 말사이다.

 규봉암은 고려 말 왜구와의 격전지였다. 1530년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규봉사’로 적기되어 있다. 1760년 『여지도서(輿地圖書)』에는 규봉사가 폐사되었다고 한다. 이후 중건되었으나 한국전쟁기에 다시 불에 탔고 1957년 이후 중창되었다. 뒤편으로 웅장한 규봉이 병풍처럼 펼쳐져 있다. 규봉은 무등산 절경 중 으뜸으로 치며, 입석대, 서석대와 더불어 무등산 3대 주상절리에 속한다.

 규봉의 웅장한 절경에 많은 시인, 승려들이 묵적을 남겼고 수도의 목적을 이루었다. 1574년 제봉 고경명의 무등산 기행문인 「유서석록」에는 신라의 명필 김생(金生, 711~791)이 쓴 ‘규봉암(圭峰庵)’ 현판이 절에 전해오다 도난당했다고 한다. 한편, 신라 말에 도선국사(道詵國師, 827~898)가 은신대에 앉아 조계산의 산세를 살펴 송광사의 절터를 잡았다고 한다. 대각국사 의천은 시 「유제서석산규봉사(留題瑞石山圭峰寺)」에서 ‘옛 성인이 이름을 남긴 이곳에서 보니 산과 바다가 일체 고른데 그윽한 샘과 서석의 형상과 더불어 세속을 벗어나 여생을 늙어가고프다’고 하였다. 보조국사(普照國師) 지눌(知訥, 1158∼1210)이 규봉의 삼존석과 십대에서 득도하였고, 인도 승려 지공이 이 절에 머물며 수도했다고 전한다. 지공의 제자 나옹혜근(懶翁惠勤, 1320~1376)도 이곳에서 수도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고승은 물론이려니와 고려 명종 때의 시인 김극기(金克己, 1150~1204), 조선 중기 문신 민충원(閔忠元, 1541~) 등이 이 절에 관한 글을 남겼다.

 규봉암에서는 1486년(성종 17년)에 고려의 보조국사 지눌의 선사상이 집약된 수행 지침서가 간행되었다. 지금까지 공개된 조선시대 간본 중에서 가장 오래된 판본이다(보물 제1148호, 명지대박물관 소장). 우리나라 불교 강원(講院)의 교과서 중의 하나로 당나라 종밀(宗密, 780∼841)이 저술한 『법집별행록』에서 중요한 요점만을 초록한 『법집별행록절요』에 사사로운 견해, 곧 사기(私記)를 붙였으므로 『법집별행록절요병입사기(法集別行錄節要幷入私記)』라고 한 것이다. 줄여서 『절요』라고도 하며, 마음으로 진리를 비추어 보고 그 진리에 따라 실천하는 귀감을 삼은 것이다. 지눌이 52세(1209) 때에 집필한 책이며, 돈오점수(頓悟漸修)에 관한 문제를 해석하고 있다. 

 
참고문헌 목록
참고문헌
-김대현 외, 『국역 무등산유산기』, 광주시립민속박물관, 2010.
-박선홍, 『무등산』, 금호문화, 1998.
-이경화, 「무등산 불교문화의 신앙적 양상과 교류」, 『역사학연구』, 45, 2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