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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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장소 경렬사(광주광역시 북구 망월동)
주제어 경렬사, 유교, 정지, 최영, 이성계, 장원봉, 최무선, 미라사대첩, 관음포대첩, 도리깨타령, 홍산대첩, 황산대첩, 나세, 진포대첩, 정충신, 전상의, 서원철폐령, 경렬사 유허비, 정지장군 예장석묘, 광주광역시 기념물, 정지장군환삼, 정지석탑,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경렬사경렬사
 고려 말의 3대 무인이 최영, 이성계, 그리고 정지 장군이다. 경렬사는 공민왕 때 전라, 경상 양도에 걸쳐 왜구를 격퇴시킨 정지 장군을 배향한 사당이다. 그는 최초로 수군을 창설하고 전함을 건조하자는 상소를 올렸던 바다의 명장으로 알려져 있다. 경렬사는 장원봉 줄기를 따라 북쪽 제4수원지 아래쪽에 펼쳐지는 협곡에 자리한 분토마을 뒷산에 있다. 군왕봉 자락 아래의 양지바른 곳이다.

 정지장군은 나주 죽곡에서 태어났다. 본관이 하동이며 시호가 경렬(景烈)이다. 19세에 사마장원, 20세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1374년(공민왕 23년) 중랑장을 거쳐 전라도 안무사가 되어 왜구 토벌과 수군 창설에 이바지하였다. 이후 전라도 순문사, 해도원수(海道元帥)를 역임하였고 양광․전라․경상․강릉도 도지휘처치사(都指揮處置使)를 지냈다. 장군은 24번의 전투를 치루면서 대부분 승전하였고, 임금으로부터 11번의 포상을 받았다. 판개성부사(判開城府使)에 임명됐으나 부임하지 못하고 1391년 10월 15일 45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정지장군은 고려 말 우왕 때인 1381년부터 1386년까지 해도원수와 해도도원수 등 6번의 수군 최고 지휘관을 지냈다. 당시 명장으로 활약한 이성계와의 나이 차이는 정지장군이 12살 아래고, 최영과는 32살 아래이며, 당시 최영이 도통사를 지낼 때 이성계는 육군을, 정지는 수군을 지휘하였다. 정지장군은 왜구를 물리치기 위해 최초로 수군 창설과 전함 건조 상소를 올렸으며, 전함에 최무선이 발명한 화포를 장착하였다. 그가 왜구와의 접전에 대승을 거둔 주요 전적은 1378년 그의 나이 32세 때의 미라사대첩(지금의 곡성군 옥과면 마전리)과 1383년 5월(우왕 9년) 남해 관음포대첩이다. 

 옥과현(玉果縣) 장파봉(將破峰) 아래에서 왜구를 섬멸한 미라사(彌羅寺)대첩에 관련하여 그의 전적을 기리는 노래, ‘도리깨타령’이 있다.
 
허이! 허이! 휴야! 휴야! 허이! 허이! 휴야! 휴야!
봄꽃 필 때 자란 보리 하지 되어 베었구나.
허이! 허이! 휴야! 휴야! 허이! 허이! 휴야! 휴야!
가을 추수 입동 전에 논밭위에 뿌린 보리
겨울잠을 자고나서 토실토실 잘도 익었네
큰 노력과 작은 노력 짠 뒤지가 가득 찬다
허이! 허이! 휴야! 휴야! 허이! 허이! 휴야! 휴야!
(후렴)
장파봉의 왜구 섬멸 포위망을 좁혀가듯
몰아치고 돌려 치니 갈 곳 없이 다 부서진다
만세 만세! 정지장군! 장파봉 대첩 만 만세!

 1383년(우왕 9년) 왜구가 120척의 함대를 이끌고 합포(마산)을 거쳐 남해 관음포만까지 들어와 정예군 140여 명을 태운 큰 배 20척을 선봉으로 세우고 공격해왔지만 정지장군의 화포공격에 17척이 격파되는 등 무참히 패하였다. 이 전투가 바로 최영의 홍산대첩, 이성계의 황산대첩, 최무선 나세의 진포대첩과 함께 고려 말 왜구를 격퇴한 4대첩으로 불리는 관음포대첩이다. 

 그는 구국의 영웅이면서 수군의 창시자로서 국가와 백성을 보호하기 위해 진력하였으며 왜구 격멸을 위해 온 힘을 다 한 장군으로 민족정기의 귀감이 되어 그를 기린다. 본디 경렬사는 1644년(인조 22년) 지금의 광주시 동구 동명동 옛 편방(片坊)에 창건되었다. 1718년부터 정지장군 이외에 그의 9대손인 충무공 정충신(鄭忠信, 1576-1636)을 배향하고 설강 유사, 송설정 고중영, 구성(龜城) 전상의(全尙毅, 1575~1627), 송암 유평, 고중영의 아들 구암 고경조, 시은 유성익 등 8분이 추배되었다. 그러나 1868년(고종 5년)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따라 1871년 철거되어 유허비만 남게 되었다. 지금의 경렬사는 1974년 정지장군유적보존회에서 1978년에 묘소가 있는 지금의 자리에 착공하여 1981년에 완공되었다. 경내에는 동명동에서 옮겨온 경렬사 유허비(1893년 기우만 글), 사우 안에는 아천 김영철이 그린 공의 영정이 있다.

 외삼문인 충의문과 내삼문인 경앙문을 지나 정지장군의 사당으로 들어간다. 서원에 들어갈 때는 시계방향으로 오른쪽 문으로 들어갔다가 왼쪽 문으로 나오는 우입좌출(右入左出), 동입서출(東入西出)을 원칙으로 한다. 그리고 성현들의 위패가 배향된 향교나 서원에 갔을 때 신도(神道)인 중앙통로를 왕래해서는 안 되며, 공수(供手)라 하여 왼손을 오른손위에 놓고 두 손을 마주 잡아 공경의 뜻과 예를 다한다. 전각의 층계는 뛰어 다니지 않고 오를 때마다 발을 가지런히 모으는 합보(合步)로 올라간다.

 정지장군의 호국정신과 항왜정신(抗倭精神)을 기려 사당 뒤쪽 언덕 위에는 정지의 묘가 있다. 전형적인 고려시대 방식의 예장석묘(禮葬石墓)로서 광주시 기념물 제2호로 지정되어 있다. 예장이란 국가에서 예를 갖추어 장사를 지내는 것으로 왕비의 부모, 빈, 귀인, 대군, 군, 공주, 옹주 등 종친의 종2품 이상, 문무관 정1품 이상 및 공신에 대한 장례로서 국장의 다음가는 국가장이라 할 수 있다. 유물관에는 관음포대첩 역사화가 그려져 있다. 정지장군 갑옷은 광주시립민속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보물 제336호). 남해 관음포대첩에서 큰 승리를 거둔 정지장군을 기리기 위해 지역주민들이 깎아 세웠다고 하는 정지석탑이 남해군 고현면 대사리 탑동삼거리에 있다(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42호).

 
참고문헌 목록
참고문헌
-국립광주박물관, 『광주 : 유구한 문화의 도시』, 국립광주박물관, 2008.
-문화재관리국, 『문화유적총람』, 문화재관리국, 1977.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http://encykorea.aks.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