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장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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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장소 충장사[광주광역시 북구 송강로(금곡동)]
주제어 충장사, 유교, 임진왜란, 김덕령, 김덕홍, 성혼, 설화, 주검동, 충장로, 고경명, 금산전투, 벽진서원, 의열사, 취가정, 이은상
충장사충장사
 충장사는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 김덕령 장군의 사우이다. 김덕령은 무등산 자락 충효동 성안마을에서 태어났으며 20세에 형 덕홍(德弘)과 함께 성혼(成渾)의 문하에서 성리학을 수학하였다. 어려서부터 무등산에서 말타기와 칼쓰기 등 무예를 익혔다. 무등산 곳곳에는 김덕령장군의 용맹과 행적에 관한 설화가 많다. 원효계곡의 상류 주검동(鑄劒洞)은 김덕령장군이 의병들과 무기를 만든 곳으로 전하고, 광주를 대표하는 거리이름인 충장로가 충장공 김덕령 장군의 충절을 기리며 명명되었다.

 김덕령은 1595년 고성지방에 상륙하던 왜군을 격퇴하여 선조로부터 충용장(忠勇將)이란 군호를 받았다. 그리고 담양지방에서 의병 5,000명을 모집 출정하여, 선조의 아들 광해군으로부터 익호장군이라는 군호를 받았다. 그의 사우는 충용문을 지나 익호문을 거쳐 영정이 있는 충장사로 들어간다. 군율에 엄격한 그는 무고를 당하여 고문 끝에 29세로 옥사하였다. 형인 덕홍은 고경명과 함께 금산싸움에 참전하여 전사하였다.

 1661년(현종 2년)에 무고를 당한 김덕령의 억울함이 밝혀져서 관작이 복구되고, 1668년 증 병조참의에 추증되었다. 1681년(숙종 7년)에 다시 증 병조판서로 추증되고, 1788년(정조 12년) 증 의정부좌참찬에 추증되고 부조특명(不逝特命)이 내려졌다. 1678년(숙종 4년) 광주의 벽진서원에 제향되었으며 이듬해 의열사(義烈祠)로 사액되었다. 시호는 충장(忠壯)이다. 김덕령장군의 묘역은 사당 바로 뒤편에 있다. 충효동에는 그를 기리기 위한 취가정(醉歌亭)이라는 정자가 있다. 1965년 노산 이은상은 억울한 원혼을 이와 같은 시로써 달래준다. 
 
충혼은 천년이 가도 
사라지지 않는다하거니
주검동 정든 옛터에
오늘도 응당 여기 계시리
어디서 서로 사랑하랴  
피 묻은 목소리 들려오네

 
참고문헌 목록
참고문헌
-국립광주박물관, 『광주 : 유구한 문화의 도시』, 국립광주박물관, 2008.
-박선홍, 『무등산』, 금호문화, 199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