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련장소 | 규봉암(전라남도 화순군 이서면 영평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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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어 | 규봉암, 사찰제영시, 권극화, 「서석규봉기」, 의상(원교국사), 규봉, 고경명, 「유서석록」, 김생, 의천(대각국사), 김극기, 너덜겅, 미륵신앙, 김시습, 고경명, 화중유시 |

옛 성인 이곳에 이름을 남긴지라 | 古聖此遺名 |
올라 보니 산과 바다 일체 고르네 | 登臨山海平 |
그윽한 샘은 맑아서 사랑스럽고 | 幽泉淸可愛 |
서석 형상 그려내긴 어렵우도다 | 瑞石畫難成 |
인간 세상 믿지 못하니 | 未信人間世 |
세속 밖의 정만 더하네 | 唯添物外情 |
어느 때나 공업을 세워 | 何時立功業 |
깊이 숨어 여생을 늙어갈거나 | 深隱老餘生 |
후반부에 이르면 탈속의 강한 의지를 보여준다. 당시에는 문벌귀족과 외척세력이 득세하면서 나라가 점차 혼란으로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의천은 왕자의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출가인의 본분을 지키고자 했지만 사정이 여의치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가 오직 바라는 것은 ‘공업’을 세워 불법을 널리 알려 이 땅을 불국토로 만드는 일이다.
기이 형상 그리기 정말 어려워 | 詭狀苦難名 |
올라 보니 만상이 모두 고르네 | 登臨萬象平 |
바위 모양 비단을 잘라 빚었고 | 石形裁錦出 |
산의 형세 옥돌을 쪼아 세웠네 | 峯勢琢圭成 |
명승 밟자 속세 자취 덮어 가리고 | 勝踐屛塵迹 |
그윽이 깃드니 도정(道情)이 더해지누나 | 幽棲添道情 |
어찌하면 속세 그물 버려두고서 | 何當抛世網 |
가부좌하여 무생을 배울거나 | 趺坐學無生 |
고려 무신집권 때의 문인 김극기의 시이다. 그가 산하대지를 두루 유람하면서 지은 작품이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제영시로 다수 실려 있다. 위의 시도 그중 하나이다. 위 시는 앞 대각국사 의천의 시를 차운한 작품이다.
수련에서 규봉의 산세가 기이하여 이름 짓기 어렵다고 말하고 있다. 이 구절은 앞의 시 4구의 ‘서석화난성’과 시상이 닮았다. 2구에서 의천과 마찬가지로 일체의 만상이 모두 고르게 보인다고 한 것은 그 또한 무분별지를 지향하는 시인이었음을 말해준다. 함련에서 규봉의 모습이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주상절리대의 육각형 돌기둥이 마치 비단처럼 곱고 봉우리마다 옥을 다듬은 듯 서 있다는 표현은 규봉을 신비화시킨다. 후반부인 경련과 미련에서는 속세로부터 거리를 두려고 하는 심적 표현이 규봉에 머무면 머물수록 더 있고 싶어 하는 속내를 비치고 있으며, 더불어 일체가 무상하다는 무생(無生)의 이치를 선정삼매에 들어 깨치고자 하는 바람으로 마무리하고 있다.
영산이란 이름에 들어맞으니 | 靈山實稱名 |
최고봉이 구름과 맞닿았도다 | 絶頂與雲平 |
어지러운 돌 그 누가 채찍질해 몰아왔나 | 亂石誰鞭去 |
기이한 벼랑 절로 깎여 이루어졌네 | 奇崖自削成 |
백암서 처음으로 도를 물은 뒤 | 栢菴初問道 |
절집에 마음 기운 지 오래라오 | 蓮社久傾情 |
한 그루 용화수 아래에서 | 一樹龍華下 |
다음 생에 만나자 약속하세 | 相逢約後生 |
그 외에도 규봉암을 대상으로 한 사찰제영시를 살펴보면, 김시습의 경우 “가고옴에 반나절 머물렀더니/차마 선방에서 내려가지 못하네”라 하여 애초에 수행하러 왔다가 규봉의 경치에 감탄하여 규봉에 머물고 말았다고 했다. 고경명은 석양에 비친 규봉의 모습을 금빛으로 묘사하면서 오솔길에 들어선 스님이 종소리 듣고 찾아간다고 하여 규봉암을 원경으로 삼아 화중유시(畵中有詩) 기법을 연상케 하는 회화적인 분위기를 자아내기도 했다.
위에서 보는 바와 같이 규봉암의 사찰제영시는 무등산의 비경답게 승려와 사대부를 막론하고 규봉의 빼어난 산세를 천혜의 비경으로 삼아 승경으로 묘사하면서 동시에 불심을 곁들이고 있는 점이 특색이다. 이는 규봉암의 위치가 세속과 상당히 떨어져 있기에 불심에 보다 집중할 수 있는 환경적인 조건이 갖추어져 있는데다가 세속인의 발걸음이 뜸한 곳이기에 가능했다고 볼 수 있다.
참고문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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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준성, 「무등산 사찰제영시 연구」, 『한민족어문연구』, 62, 한민족어문학회, 20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