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장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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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장소 충장사[광주광역시 북구 송강로(금곡동)]
주제어 충장사, 유교건축, 김덕령, 고경명, 금산전투, 이몽학, 신경행, 의열사, 충장사 은륜비각, 충장사 김덕령장군의복, 충장사 김덕령장군관곽및수의, 충장사 김덕령장군묘, 충효동 정려비각, 김덕령생가터, 주검동, 규봉암, 춘산곡시비
충장사 영당충장사 영당
충장사 은륜비각충장사 은륜비각
 충장사는 원효사로 올라가는 도로를 따라가다 배재에 이르면 길의 왼편에 묘와 함께 꾸며져 있다. 충장사는 조선중엽의 의병장인 충장공(忠壯公) 김덕령(金德齡, 1567~1596)을 모신 사우로, 1974년 4월에 창립한 충장공김덕령장군유적보존회를 중심으로 사우 건립에 착수하여 1975년 7월에 완공됐다.

 무등산의 전설과 연관된 대표적인 인물로는 충장공 김덕령을 빼놓을 수 없다. 무등산의 골짜기마다 그의 전설이 남아 있고, 그는 민초들의 가슴속에 구국의 영웅으로 각인되었다. 김덕령은 광주 석저촌(현 충효동)에서 태어났으며, 어려서부터 무등산에서 말타기와 칼쓰기 등의 무예를 익혔고 글 읽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김덕령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형 김덕홍(金德弘, 1558~1592)과 함께 제봉 고경명의 휘하로 들어갔다. 이후 어머니의 병이 위독해지자 형 김덕홍의 권유로 고향에 내려온 사이 금산전투에서 형이 제봉과 함께 전사했다는 비보를 받게 된다. 그리고 이듬해 8월 모친상을 당해 장례를 치르고, 담양과 인근 고을을 중심으로 장정 5천의 의병을 모았다. 12월에 충용장의 군호를 받고 왜군의 진출을 막고 방어했다. 1595년에는 고성을 침략하는 왜군을 격퇴하는 큰 공을 세웠다. 이후 충청도에서 일어난 이몽학(李夢鶴, ?~ 1596)의 난을 토벌하기 위해 출전한 장군은 난이 진압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회군하였는데, 이때 충청도 순찰사의 종사관 신경행(辛景行, 1547∼?)의 무고로 이몽학과 내통했다는 혐의로 체포되어 억울한 옥살이 끝에 29세에 옥사했다. 김덕령은 1661년에야 억울함이 알려지면서 관직에 복직되었다. 1668년에는 병조참의에 추증되고, 1678년 벽진서원에 배향되었으며, 1681년에는 병조판서에 증직되어 의열사(義烈祠)에 제향되었다. 이후 1788년에는 다시 좌찬성에 가증되었다.

 충장사의 중요 건축물은 근년에 지은 것들이 대부분으로 철골와의 형태이다. 영당에는 영정과 교지가 봉안되어 있고, 내삼문인 충용문(忠勇門)이 있다. 영당 앞에는 1842년(혜종 8년) 광주목사 조철영(趙澈永)이 세운 은륜비(恩綸碑)를 모신 제각과 은륜비해설비(1980)가 있다. 충장사 입구의 우측에는 유물관이 위치하고 있어 1974년 11월 충장공묘를 이장할 때 발굴된 관곽과 의복 등을 전시하고 있다. 이 출토품들은 현재 중요민속자료 제111호로 지정되었다. 사우 뒤쪽의 구릉에는 충장공의 묘가 있다. 묘소는 충효동 배재마을에서 1974년 현 위치로 옮겼고, 1975년에 묘비를 세웠다.

 앞서 언급하였듯이 무등산 일대에는 김덕령과 관련된 전설이나 설화가 깃든 유적이 많다. 대상 유적으로는 충효동 정려비각이나 충장공 생가터, 그리고 무기를 제련했다고 전해지는 주검동, 규봉암 등을 들 수 있다. 그리고 광주 사직공원에는 「춘산곡시비」를 세웠는데, 이는 1596년 김덕령이 옥중에서 읊은 시를 새긴 것이다.

 
참고문헌 목록
참고문헌
광주직할시․향토문화개발협의회 편, 『무등산 : 문화유적조사』, 광주직할시, 1988.
박선홍, 『무등산』, 다지리, 2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