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등산의 저항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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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주는 의향(義鄕), 미향(味鄕), 예향(藝鄕)의 도시로 알려져 있다. 그중에서 화순과 담양 지역의 일부를 포함한 무등산권에서 주목되는 것은 단연 의향의 자취라 하겠다. 외세(外勢)의 침략에 맞서 싸우고, 절의(節義)를 지키면서 불의(不義)에 대항했으며, 독재(獨裁)와 정면으로 대결하여 민주화로 가는 길을 열었던 곳이 바로 무등산이었다.

 ‘무등산의 저항운동’ 부분에서는 이러한 다양한 경향의 저항운동을 전반적으로 다룰 것인데, 다만 저항운동으로 선정하는 몇 가지 기준을 잡아보았다. 첫째, 무등산 권역 내에서 발생한 저항운동일 것, 둘째, 저항운동을 펼친 인물이 이곳에서 태어났거나 성장했을 것, 셋째, 현재 무등산 권역 내에서 그 사건이나 인물을 추모하고 있을 것. 이상 3가지 정도를 좌표로 하여 장소, 인물, 유물이라는 3가지 범주로 이들을 나누어 서술하려고 한다.

 무등산 권역 내에서 행해진 저항운동을 시간순으로 설명해 보면 다음과 같다. 우선 고려 말 왜구(倭寇)의 침입에 맞서 싸운 규봉(圭峰) 전투를 들 수 있다. 당시에는 왜구들이 대규모로 서남해안에 침입하여 약탈을 일삼았기 때문에 그 피해가 컸다. 그래서 왜구에 대한 공포심도 만만치 않았다. 하지만 우왕 7년(1381) 4월, 무등산의 규봉을 경유하던 왜구를 이 지역의 군사들이 크게 무찔렀다. 그 전투의 현장은 바로 현재의 규봉암(圭峰庵) 일대이다. 한편 정지(鄭地, 1347~1391) 장군은 1383년 남해의 관음포(觀音浦) 해전에서 왜구를 격파한 바 있다. 수군의 창시자로도 불리는 정지 장군은 현재 광주광역시 북구 망월동에 위치한 경렬사(景烈祠)에 모셔져 있으며, 예장석묘도 근처에 있다. 전투 시에 착용했다고 전해지는 갑옷은 광주광역시립민속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들어서자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다고 하여 절의를 지킨 72명의 현자(賢者)들이 경기도 개풍군의 두문동(杜門洞)에 은거한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런데 이들뿐만 아니라 개성을 떠나 여러 지역으로 낙향한 인물들도 많았다. 그중에서 전신민(全新民)은 담양으로 내려와서 독수정(獨守亭)을 짓고 살면서 고려왕조에 대한 절의를 지켰다.

 조선시대에는 임진왜란, 정묘․병자호란과 같은 외세에 의한 대규모의 침략전쟁으로 국가적인 위기상황이 몇 차례 발생했었다. 하지만 무등산권에 거주하던 이들은 이에 도망하지 않고 의병(義兵)을 모아 맞서 싸웠다. 당시의 의병활동은 매우 활발하여 무등산 곳곳에 관련 유적들이 산재해 있다. 

 우선,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 김덕령(金德齡, 1568~1596)이 태어나고 자란 충효동(忠孝洞) 입구에는 충효동 정려비각(忠孝洞旌閭碑閣)이 세워져 있으며, 김덕령의 생가터와 부조묘(不祧廟) 등이 자리 잡고 있다. 또한 근처에는 김덕령의 억울한 죽음을 추모한 석주(石洲) 권필(權韠, 1569~1612)과 관련한 취가정(醉歌亭)도 있다. 충효동에서 무등산장 쪽으로 더 올라가다보면 풍암저수지가 나오는데 그곳에 김덕령의 동생 김덕보(金德普, 1571~1627)가 형들을 그리워하며 은거했던 풍암정(楓巖亭)이 위치해 있다. 원효사 쪽으로 더 올라가면 김덕령을 모신 사우와 묘소가 있는 충장사(忠壯祠)도 있다. 참고로 김덕령의 묘를 이장할 때 출토된 의복은 중요민속자료로 등록되어 있다. 원효계곡을 따라 무등산옛길을 더 걷다보면 제철유적지와 금곡동제철유적과 만나게 된다. 또 제4수원지 쪽으로 넘어가면 화암마을이 나오는데, 그곳에는 김덕령 장군의 기의(起義)를 권유했던 송제민(宋齊民, 1549~1602)을 모신 운암서원(雲巖書院)이 있다. 이처럼 저항운동과 관련해서 무등산 권역에서 가장 많이 확인할 수 있는 장소는 임진왜란이라는 사건과, 김덕령이라는 의병장에 집중되어 있다. 임진왜란과 관련해서는 화순 지역의 활동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바로 충의공(忠毅公) 최경회(崔慶會, 1532~1593) 일가의 의병활동을 알 수 있는 고사정(高士亭), 최경회사당(崔慶會祠堂), 오성산성(烏城山城) 등의 장소가 화순 지역에 인접한 무등산권에 있다.

 인조 2년(1624)에는 인조반정(仁祖反正) 이후 논공행상(論功行賞)에서 불만을 표출하면서 이괄(李适, 1587~1624)이 반란을 일으켰다. 이 반란군을 제압하는 데 큰 공을 세운 인물이 바로 금남군(錦南君) 정충신(鄭忠信, 1576~1636)이다. 광주 시내의 중심가 ‘금남로’는 그의 군호에서 따온 것이다.

 인조 5년(1627)에는 후금(後金)이 조선을 침입하였는데, 이를 정묘호란이라고 한다. 정묘호란 때에 안주성 전투에서 전사한 구성(龜城) 전상의(全尙毅, 1575∼1627) 장군이 있는데, 그는 광주광역시 남구 구동 출신의 인물로 현재 운암서원 근처인 충민사(忠愍祠)에 모셔져 있다. 또 인근에는 전상의 장군의 예장석묘가 위치하고 있다.

 인조 14년(1636)년에는 병자호란이 발발하였다. 청나라의 침입에 맞서 무등산 권역에 살던 이들은 또다시 의병을 모았다. 화순의 조수성(曺守誠, 1570~1644), 류함(柳涵, 1576~1661), 평택임씨(平澤林氏) 7형제 등이 대표적이다. 각각 쌍충각(雙忠閣), 환산정(環山亭), 대리 칠충각(大里七忠閣)과 관련이 되어 있다. 

 한말에는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에 맞서 의병이 일어났다. 담양의 무동마을에서는 일본군과 의병의 전투가 벌어졌는데, 김태원(金泰元, 1870~1908) 장군이 일본군 장수 요시다 쇼사부로(吉田勝三郞)를 사살했다. 이를 기리는 전적비가 마을 입구에 세워져 있다. 

 해방 이후 군사독재에 저항하면서 민주주의를 실현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끊이지 않았다. 특히 1980년 5월 광주에서는 수많은 학생들과 시민들이 군사독재에 맞서 싸웠다. 군사정권에서는 이러한 저항에 폭압적 진압을 가했고, 많은 이들이 희생되었다. 이 사건에 의해 목숨을 잃은 희생자들은 현재 망월동묘지(구 묘역)와 국립5․18민주묘지(신 묘역)에 안장되어 있다. 또한 1989년에는 학원민주화투쟁을 하던 이철규(李哲揆, 1964~1989)의 시신이 제4수원지에서 발견되어 세상의 이목이 무등산에 집중되기도 했다.

 이렇듯 무등산권은 역사의 중요한 흐름 속에서 끊임없이 외세, 불의, 독재정권에 맞서 싸운 저항운동의 중심지였다.